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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History

어느 군인의 이야기

꿈을 위해 잠을 잊은 그대에게 2020. 4. 4. 11:14

 게시물은 역사적 사실과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게시물입니다.

 

 

군인 (軍人)

 

 

 

 

 

박정희 (朴正熙) - 대한민국의 군인, 교사, 정치가이며 5,6,7,8,9  대통령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군인 출신 정치가이다.

 

 

 

 

그는 1917 11 14 경상북도 구미 어느 시골마을 가난한 농부의 5 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4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의 어머니 백남의는  속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자 매우 부끄러워했다.

 

먹을 밥도 키울 여력도 안되었기 때문에 당시 간장 사발과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고 바닥에 구르며 애를 떼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였고 당시 성적으로 급장을 정해 가장 성적이 뛰어났던 박정희는

 

학기 내내 급장을 맡았고 뛰어난 성적과 강력한 리더쉽으로 학우들을 이끌었다고 한다.

 

역사, 지리, 산수는 항상 만점이었다고 한다.

 

 

 

 

 

독서를 즐겨 했고 특히 위인전을 좋아했던 박정희는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나폴레옹의 일대기를 그린 위인전을 좋아했고

 

구미 지방에서 훈련하던 부대를 보고 군인이 되고 싶었고 위인전들을 읽으며 소년시절부터 군인을 동경하게 되었다.

 

 

 

 

 

뛰어난 성적으로 학교 최초로 대구사범학교에 합격하였다.

 

가족들은 학비를 보탤 형편이 안되자 박정희가 낙제하길 바랬지만 단번에 붙어버렸다

 

일제강점기 당시 사범학교의 목표는 뛰어난 조선인 학생에게 철저히 일제식 교육을 시켜 일본화를 만들기 위한 작업  하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범학교에서는 그렇게 뛰어난 성적을 보이지 못했으나  어려움 없이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 조혼 풍습에 의해 사범학교 재학시절 아버지가 3 아래인 김호남과 박정희를 결혼시켰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당시 교사는 가장 안정적인 직장으로 선호되었기에 집안은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 제자들은 선생 박정희를 애국심이 투철한 교사라고 기억한다.

 

주로 태극기 그리는 수업과 한국어 수업을 항상 빼먹지 않고 가르치던 박정희는 

 

그로 인해 일본인 교사와 자주 의견 다툼이 있었고 교육정책에 불만이 많았던 그는 돌연 쫓겨나듯이 교편을 내려놓는다.

 

이후 어린 시절부터 동경했던 군인이 되기 위하여 만주군관학교로 입학하게 되는데

 

만주군관학교 입학과정은 지금까지도 박정희의 친일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남민전의 전신) 만주군관학교 입학 당시 박정희의 혈서라고 주장하며 만주일보의 1939 3 31일자 신문을 공개했고

 

'盡忠報國 滅死奉公 (진충보국 멸사봉공)' -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하며 나의 죽음으로 나라를 받들겠다는 

 

쓰여져 있는 신문기사는 적지 않은 충격을 주게 된다.

 

 

 

 

 

하지만 만주일보는 1908년에 폐간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자 그들은 만주신문, 만주신보 라고 다시 걸고 넘어졌다.

 

만주신보의 폐간일은 1938, 폐간된  신문에서 1939 혈서관련의 기사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의문이다.

 

설령 기사가 사실로 인정된다 해도 당시 기사에서 박정희의 혈서관련 날짜는 3 31일이지만

 

만주군관학교 합격자 발표 날짜는 2 24  한달 뒤에 저런 기사를 쓸까?

 

하지만 아직까지 논쟁이 끊이지 않는 주제이고 해결방안은 원본의 발견이다.

 

있지도 않는 원본을 찾아내는  불가능한 일이고

 

혈서의 원본은 절대 나오지 않고 기사 또한 원본을 직접 일본의 국립박물관에서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문제는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꺼라 예상된다.

 

 

 

 

 

 친일문제로 거론되는 것은 박정희의 창씨개명 '다카키 마사오'

 

당시 창씨개명은 일제의 탄압으로 대부분 시행되었다

 

그리고 박정희의 창씨개명을 한자로 그대로 나타내면 '高木正雄 (고목정웅)'

 

 뜻은 고령 박씨를 바르게 지키겠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억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당시 창씨개명을 반대하자는 의미하는 뜻을 가진 한자어로 개명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참고로 김머중이는 '豊田大中 (풍전대중)'이라는 전형적인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했다.

 

 

 

 

 

만주군관학교 입학 자체가 친일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렇다면

 

당시 일제치하에서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인 가게에서 일을 하거나 일본의 신문을 돌리는 사람들까지

 

일제치하 당시의 모든 이들을 친일파라고 규정하는 논리이다.

 

만주군의 독립군 토벌 주장은 허위사실이며, 만주군은 독립군 토벌에 관여하지 않았다.

 

재직시절 태극기를 그리고 한국어 수업을 계속하여 일본인 교사와 다투기까지 했던 사람이 친일파라   있을까?

 

 

 

 

 

 

 

독립군 김학규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고 그의 도움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하고 

 

독립운동가 조경환선생은 '박정희는 조선인 병사를 독립군으로 빼내어준 고마운 청년이라 했다.

 

 사실 또한 믿을  없다고 좌빨들은 주장한다.

 

 

 

 

 

그렇다면 독립군을 토벌하고 창씨개명까지    그런 무시무시한 친일파가

 

 어찌 박정희는 독립군 역사 발굴  훈장 수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

 

광복 이후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군대에서 육군 소위로 임관되며 능력을 인정받아 중위를 거치지 않고 대위로 바로 진급한다.

 

 

 

이후 여수, 순천 사건 (이하 여순사건) 남로당의 핵심 인물이었던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상희로 인해

 

박정희는  작전정보국에 의해서 여순사건에 연루되었고 이후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후에 백선엽 장군과의 만남을 통해 오해를 풀고 백선엽은 적극적으로 박정희를 도와줌으로

 

박정희는 2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 받고, 정보국 문관으로 강제 예편 받았으며 

 

한국전쟁으로 인해 박정희는 소령으로 발탁 되었다.

 

박정희를 까는 세력들은 박정희가 종북,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하지만 그가 진짜 사회주의자, 종북주의자였다면

 

한국전쟁에 다시 소령으로 현역을 복귀하는  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10월에 육영수를 소개 받았고 육군지휘소가 서울로 옮기게 되자 약혼식을 맺었으며 

 

6.25전쟁 당시 10 25 참모장으로 임명된다

 

한국전쟁 이후 차질 없이 진급했으며 소장진급심사 당시 사상문제로 트집이 잡혀 잠시 주춤했으나

 

소장진급을 하게 되고 부군단장, 사단장, 사령관을 지내게 된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정권 말기 시절에 정치권은 물론 경제계도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1960 5월에 하야한다. 이후에 과도내각을 거치고 장면내각이 들어서게 된다.

 

 

 

장면 총리는 청렴한 정치가로 평가를 받지만 무능력한 정치가라고도 평가 받는다.

 

후에 장면과 박정희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다시 주목을 받는데

 

장면내각은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는 농업위주의 국가발전을 생각했으며

 

박정희는 미래를 보고 중화학공업 육성을 통해 국가의 기간산업을 활성화하여 국가의 산업화를 꾀하는 정책을 생각했다.

 

따라서 박정희가 장면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자기 이름만을 붙여 바꿔놨다는 사실을 허위날조이다.

 

 

 

1961 5 16 박정희는 빈곤의 대한민국 역사를 바꾸게  혁명을 일으킨다.

 

부정부패가 판치는 세상과 국민들이 굶주릴  배를 채우는 부정 축재자들을 가만히   없었던 것이다.

 

혁명은 박정희 주도하에 진행되었고 혁명 당시 윤보선 대통령은 ' 것이 왔다'라는 식의 말을 했으며

 

이는 사실상 군부의 혁명을 인정한 것이다.

 

 

 

미국은 군사혁명에 크게 반대하고 분노하였지만

 

5.16 혁명은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전두환 주도의 육사생도 퍼레이드를 보고  뒤에 어쩔  없는 미국은 혁명정부를 인정하게 된다.

 

전두환은 육사생도 퍼레이드로 인해 이후 박정희의 눈에 들어오게 되고 박정희를 위해 서거 전까지 군에 남는다.

 

혁명을 지도했던 군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세우고 후에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든다.

 

 과정에서 박정희는 장도영을 눌러버리고 의장자리에 올라 대통령의 권한 대행도 물려받게 된다.

 

정치깡패들이 판쳤던 시대에 분노했던 국민들은 정치깡패, 폭력배들이 전격 체포  사형선고를 받자 더욱  혁명정부에게 열광하였다.

 

또한 화폐개혁으로 대한민국의 경제를  조르고 있던 화교 짱깨놈들은 자신들의 화폐가치가 종이조각으로 되어버리자

 

한국을 떠나 동남아로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정치에 발을 딛지 않을 꺼라 다짐했던 박정희는 주변 사람들의 칼을 뽑았으니 이후도 계속 각하가 맡으라는 권유에 

 

이후 1963 박정희는 대장으로 예편하고 5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윤보선과 적은 차이로 승리한다.

 

 

 

수도 서울과  수도권 지역에서의 차이로 승리   있었으며 항상 우덜식을 주장하던 그들도

 

그때 당시까지만 해도 혁명정부를 지지하였다.

 

당선 이후에 경제개발과 국가재건에 자신의 목숨을 바칠 준비를  박정희는 앞으로 빠르게 나가게 된다.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 파병을 학수고대 끝에 결정하게  박정희는 미국에게  많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참모진에게 혼신의 힘을 다하라고 특별 지시하여  차례 협상 끝에 본금의 3배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베트남 참전은 미국의 한국전쟁 희생의 보답의 의미였으며 국가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가본적도 없는 타지에서 피를 흘린 그들의 희생 정신은 대한민국에게 피와 살이 되었다.

 

 

 

 

당시 외화가 없기 때문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김종필 생각해낸 '한일협정'

 

박정희는  계획을 들었을 때에는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국가기반사업을 위해서는 어쩔  없다는 참모진의 부탁과 설득으로 생각을 바꾸게 된다

 

한일협정을 추진하게 되고 1964 6 3 이명박 외의 학생들이 주도하는 반일시위로 인해 

 

박정희는 자신의 뜻을 몰라주는 대학생들이 미웠을 뿐이다.

 

 우리가 협정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남의 나라에 우리 피를 흘리러 가야 하는지

 

그들은 몰랐다 아니 몰랐었다 한참 뒤에 그때 극구 반대했던  사람들은 한참 뒤에 깨달았다.

 

이뿐만 아니라 그가 추진하고자 하는 모든 정책은 반대에 휩쓸렸다.

 

 

 

패배정신과 빈곤으로 썩어가는 국민들의 정신을 '우리도 하면 된다', '잘살아보세'라는 정신으로 개조하고

 

주저앉아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새겨주었다.

 

 

 

이제 국민들도 정말 하면 된다라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노래 가사 그대로 사람들은

 

새벽종이 울리고 아침이 밝으면 너도 나도 일어나서  마을을 가꾸어 나갔다.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바꾸는  마을 서로서로 도와서 모두 같이 배불리  살자는 마음으로 똘똘 뭉쳤다.

 

하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정신만으로는 부족했다

 

박정희는 돈이 필요했다.

 

 

 

서독파견을 조건으로 돈을 빌려왔다.  과정에서는 박정희가 자기 발로 직접가게 된다.

 

서독의 국회 연설에서  나라의 대통령의  맺힌 연설은 서독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  빌려주세요... 한국에   빌려주세요... 우리도 당신들처럼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기려면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서 이기려면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돈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라고 호소한다.

 

그들은 버는 족족 한국에 송금하고  많이  오래 일하고 싶어한다.  잘살아보게 만들려고...

 

일년 뒤에 박정희는 다시 그들을 만나기 위해 서독행에 오르게 된다.

 

애국가를 부르던 도중에 박정희를 포함한 수행원 그리고 550여명의 파견된 사람들은

 

애국가를 제창하면서 가난의 아픔을 느끼며 눈물 바다를 만들게 된다.

 

그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모르면서 그저 반대한다.

 

서독 파견 때도  지하 막장에서 그들이 가쁜 숨을 몰아 쉬었는지,   다른 사람의 시체와 지독한 병간호를 했는지.

 

 

 

 

남의 나라까지 가서 가난하다고 다른 피부색깔의 사람들에게 치욕을 받아야 하는 

 

다른 나라 모두  나라를 무시했던 모두 비웃었던 사람들에게 박정희는 ' 보여주겠다.'라고 다짐한다.

 

 

 

 

1962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은 공업지구를 설립에 중화학공업 육성에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서독에 가서 차가 쌩쌩 달리던 아우토반을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는 물류이동의 중요성을 생각하여 

 

경부고속도로를 추진하게 되었다.

 

직접 설계도, 항공 사진, 공사과정  모든 노력을 쏟아 부었다. 물론  사람들은 반대했다.

 

누구는 옥수수나 먹자고 감자나 먹자고 그랬다. 박정희는 그래도 묵묵히 그의 계획을 추진하였다

 

2 5개월이라는 기록적인 공사시간으로 1970 7 7일에 완공되었으며

 

공사과정  숨을 거둔 77명을 기리기 위해 완공식은 7 7일로 잡았다.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 완공으로 새로운 물길이  빠르게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항상 모두들 실패한다고 했다.

 

 

 

국가의 기반이 되는 철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자고 

 

포항제철 설립할 때도 

 

 

 

조선소를 지을 때도 

 

 

우리 손으로 직접 우리나라를 지킬 무기를 만들자고  때도

 

모두들 우리는 안된다고 안될 것이라고 생각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 붙였다.

 

물론  과정에서의 희생은 없다고  수는 없지만 모두 미래를 위한 길이라고 박정희는 믿었다.

 

그리고 우리 후손들이 배부르게 먹으며 희생한 우리들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박정희 혼자  모든 것을  이룬 것은 아니다.

 

안되는  어디 있냐는 정신으로 무장한 기업가들이 있었고, 자기 자신을 국가 산업을 위해 희생했던 이도 있었다.

 

 

 

무엇보다 다같이 합심했던 그때 우리의 어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끈 것은 박정희라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이끈  과정이 모두 옳았다고는   없다

 

 

 

 

 

 

하지만 박정희는 자기 자신을 조국을 위해, 나라 발전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현재 많은 젊은이들과 지식인의 탈을 뒤집어쓴 사람들은 말한다.

 

박정희는 친일매국노라고 그가  것은 핍박뿐이었다고 더러운 독재자라고 

 

 

 

박정희도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누군가의 남편이었고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가정의 가정이어도

 

하지만  모든  이전에

 

 

 

 

대한민국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의 가장이었다.

 

 

 

 

전쟁의 아픔으로 울창한  하나 없는 곳에 치산녹화를 꿈꾸며 나무를 심고

 

 

 

소매, 바지 걷어 올려 마을 사람들과 같이 모를 심고  추수를 하고

 

 

 

 

일하며 흘렸던 땀을 막걸리  사발에 털어버리고

 

 

 

   눈이 덮인 마당도 쓰는 그냥 어느 가정에서나   있던 가장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분명히

 

 

 

보잘  없는 가난한 나라에 공장을 세우고 돈을 벌어

 

 

 

수출강대국과 선진국의 기반을 닦고

 

 

희망찬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점점 잊혀진다 했던가

 

 

 

 

하는  아무것도 없었던 김대중이의 기념관이 들어설 때도 아무   했던 사람들이

 

박정희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세우자니 이제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반대한다.

 

배고팠던  시절을 잊어간다.

 

 

 

그때 모두들 배고파 안녕하지 못했던  시절을 잊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기억한다

 

박정희 그는 썩어빠진 정신과 패배의식에 갇혀있던 대한민국을 바꿔놓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맡은 책임을 완수하는 군인 정신을 가진 군인이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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