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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History

박정희 정권의 숨은 영웅 오원철

꿈을 위해 잠을 잊은 그대에게 2020. 4. 27. 13:51

유비에게 제갈공명  박정희에게 오원철

박정희 정권의 숨은 영웅 오원철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자.

 

 

공돌이의 아버지 오원철의 간단한 약력 

1928년 황해도 출신 1945년 경성공전 화공과에 입학했고 한국전당시 공군기술 장교로 들어가 공돌이로서의

경력을 쌓는다 약 7년간의 군복무를 했고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예편후 최초의 국산 자동차인 c발 자동차

공장장과 자동차 부품회사 공장장으로 일하며 당시 한국 공돌이로서는 최고 수준의 활약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위대한 쿠테타 516 군사혁명때 박정희와 인연이 되었고 군정때부터 한국 공돌이의 아버지는 싹을

틔우며 요직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박정희 이전시절부터 관료시절까지 그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전두환 시절 경제대통령이라는 김재익도 박정희 시절 관료로서 활약을 했지만 오원철의 위상에 비하면 서너단계 아래 

 

 


1928년 10월 황해도 풍천에서 출생 
1945년  4월 경성공업전문학교 화공과 입학 
1950년 12월 공군 기술장교후보생으로 입대 
1951년  6월 공군소위로 임관 
1951년  9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졸업 
1957년  8월 공군 소령으로 전역 
1957년  9월 시발자동차회사 공장장 
1960년  6월 국산자동차주식회사 공장장 
1961년  5월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 
1961년  7월 상공부 화학과장 
1964년  6월 상공부 공업제1국장 
1968년  4월 상공부 기획관리실장 
1970년  1월 상공부 광공전 차관보 
1971년  11월 ~ 1979년 12월 대통령 경제 제2수석비서관 겸 중화학 공업 기획단 단장 

 

그냥 박정희 정권과 함께 시작해서 끝을 박정희 정권과 운명을 함께한 관료다. 

그리고 그의 전성기때 이룩한 업적은 1970년대에 이르러 박정희 정권의 대표작인  

중화학 공업 육성과 자주국방 사업이다. 

 

1차 경제개발 5개년때부터 천재성을 보여준 오원철

오원철은 마이크로 접근 방법(미시적)의 개념으로 독창적인 산업화 모델을 성공시킨다.

미국은 경제개발 계획을 보고 쇼핑 리스트라고 폄훼했고 반드시 실패할것이라고 예단했다고 한다( 오원철 증언)

오원철의 마이크로 접근 방법은 개별 산업(공장)시설 리스트를 만들고 하나씩 건설해 나가는 것이였고 성장을 했다.

거점을 하나둘씩 만들어서 산업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으로서 오원철은 이 방안대로 수출공업 , 석유화학공업

전자공업, 중화학 공업방식에도 그대로 적용했고 오원철은 이 전략을 Impact Policy 라고 명명을 했다 

또 여러가지 한국식 경제 개발정책 개념을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오원철이다. 

 

 

"모든 업종이나 품목 전부를 느슨하게 그리고 동시에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파급효과가 큰 업종이나 품목, 즉, 전략산업을 엄격히 선정한 후 이 전략사업을 공업 단지화 작전, 100% 이상 가동 작전, 공기 단축 작전, 국제 규모화 작전, 목돈 작전(예산을 미리 다 마련해 놓고 사업을 추진하는 방법)등을 활용하여 집중 지원하는 방식입니다. 즉 전략사업을 미리 마련해놓고 국가적 지원하에 적극 육성하니 모든 공업수준이 한 단계 상승하고, 그 효과가 전 경제에 파급되어 나갔고, 투자효과가 가장 좋고, 시간이 단축되고, 우리나라 경제가 성공적으로 발전하여, 외국의 신용도도 높아져서 차관 얻는 데 수월해졌습니다. 최근 유행어인 ‘선택과 집중’과 상통하는 전략인 셈이지요. 그러나 당시에는 이를 ‘불균형 성장이론’이니 ‘개발독재’니 라며 비판이 많았습니다. 특혜 시비도 있었구요. "

 -시대정신 - 

 

5 · 16 이 일어난지 불과 일주일 후인 1961년 5월 23일, 그는 군사정부에 의해 소환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으로 일하다가 얼마 후 상공부 화학과장으로 발령 받았다. 상공부 화학과장으로 일하는 동안, 그는 제1차 경제개발 5 개 년계획(1962년 1월 13일에 발표)의 화학공업 부문을 입안하였으며, 특히 정유공장과 비료공장, 시멘트공장 관련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때 경제개발에 대한 "마이크로 접근방법"과 "임팩트 폴리시(impact policy)"에 대한 아이디어를 확립했으며, 재정자금 활용방책으로는 "목돈 작전"을, 공업화 전술로는 "공업 단지화 전술"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이때 울산(蔚山) 공업단지 건설을 입안, 추진했다) 여기서 "목돈 작전"은 새로운 사업을 추진해 나갈 때 필요한 자금을 미리 확보해 두는 방법을 말하고, "공업 단지화 전술"이란 공장건설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정부가 먼저 공업단지를 조성해 놓는 방법을 뜻한다. 그의 이러한 아이디어는 한국에서 최초로 성공한 공업 단지인 울산공업단지의 계획과 건설에서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출처 - http://www.wisdomtree.co.kr/board/bbs/board.php?bo_table=book01_04&wr_id=2

 

중화학 공업 자주국방을 성공시킨 오원철

박정희는 대중 경제론자 김대중과의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취임사에서 농공병진 정책을 실시하여 중산층의

양산을 하여 자유 민주주의 근본적 토대가 될수 있는 기반을 확립할것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해냈다.

좌좀 병신새끼들이 욕하는 유신 시대에 박정희는 권력을 집중을 통해서 강대국형 국가구조를 만들어 버린다.

 

중화학 공업 + 자주국방 사업 + 새마을 사업 + 산림녹화 사업  =  위대한 대한민국 

 

그당시 기준으로 전세계 모두가 과연 한국이 해낼수 있을수 있을까라는 회의론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이하 관료 기술자 국민 모두가 총화 단결해서 조선놈은 안돼라는 사고방식을 깨기 위해서 

할수있다라는 민족성 교육까지 포함하여 한반도 역사상 위대한 국가 창조작업을 1970년대에 실시했던 것이다.  

 

 

"帶劍(대검)의 武勇(무용)길이┈" 26년만의 韓國告別(한국고별)┈美(미)7師團(사단)

  • 1971.03.26
  • 경향신문
  • 3면
  • 정치
  • 기사(뉴스)

 


1970년대는 안보가 커다란 이슈였다  미국은 닉슨 독트린과 주한미군 7사단이 철수를 하여 한국의 안보적 위기감을

불러왔고 1차 오일쇼크로 자원은 고갈 되었다 박정희는 이 위기를 대일 청구권으로 해소함과 동시에 역으로 중동진출을 했고 

대한민국의 위대한 도박을 시작했다 바로 중화학 공업 육성을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 이 모든 사령탑을 바로 오원철이 

주도했고 거점사업으로 박태준이 실패하면 바다에 빠져죽자는 우향우 정신으로 산업 보국의 일념으로 포철 건설을 시작했다.  

또 박정희는 수많은 기업인들에게 불가능한듯한 미션을 던져주고 국가에서 해줄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함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의 역사를 만들어 버리게 한다.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산업조직을 선진공업국의 공업구조와 같은 산업조직으로 일대 개편하는 ‘공업구조개편’작업이었습니다. 60~70년대에는 남북관계 대결, 미군철수 등으로 국가안보 문제가 제일 크지 않았습니까. 1970년 7월 닉슨 독트린의 일방적 통고로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국군현대화 사업이 시급해졌지요. 소위 자1위국방의 일환으로 ‘방위산업’을 육성해야했습니다. 즉각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김학렬 부총리는 ‘4대 핵공장 건설’사업을 시작했으나 1년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었습니다. 수지가 맞지 않는 공장에 돈을 빌려주겠다는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어떠한 병기도 분해하면 부품상태가 됩니다. 이 부품은 규정된 소재로 설계도면대로 가공생산해서 조립하면 병기는 완성됩니다. 다만 정밀가공 수준이 문제입니다. 병기공장을 국영으로 지을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가장 우수한 유관 민수공장을 선정해서 부품별 또는 뭉치별로 분담 생산시키면, 공장건설 비용도 줄일 수 있고 무기 수요의 변동에 따른 비경제성도 극소화시킬 수 있습니다. 즉 평상시에는 일반상품 생산에 주력하고 수요가 있을 때만 무기를 만들어서 경쟁력을 갖게 하자는 전략이지요.” 

당시 상공부 광공전鑛工電 차관보로써 방위산업육성 4인위원회의 한 사람이었던 저는 대강 이런 내용의 방위산업 육성책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대통령께 보고했습니다. 제 보고를 받고 박 대통령은 방위산업을 자신이 몸소 직접 챙겨야 되겠다고 하면서 청와대비서실 내에 경제 제2수석실을 신설하고 그 책임자로 저를 임명하셨습니다. 경제 제2수석 비서관의 업무는 다른 수석 비서관실과 전혀 달랐습니다. 대통령의 특별관심 사항만 다루는 TFT 성격이 강했지요. 처음에는 방위산업 육성이 주임무였는데, 그 후부터 박 대통령이 서거할 때 까지 8년 동안 ‘중화학공업’, ‘기술인력 양성’, ‘연구기관 설립’, ‘율곡사업’, ‘행정수도 이전과 국토개발’ 등이 추가되었습니다. 저는 즉시 병기개발사업을 추진해 나갔고 그 후 100억 달러를 수출하기 위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계획할 때 ‘방위산업건설 계획’ ‘100억 달러 수출계획’ ‘중화학공업 건설 계획’ 등 3대 사업을 한 시스템으로 통합했습니다. 즉 병기를 생산하는 중화학공업, 수출을 하는 중화학공업을 건설하려는 전략이었지요. 

  -시대정신 - 

 

 

 

박정희는 KIDA KIST ADD 를 신설하여 과학도들을 모아서 자주국방 정책을 실시했고 개인화기 하나 만들지 못하는

국가였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개인화기를 자체 생산하기 위한 사업인 번개사업을 시작으로 지대지 미사일까지

만들어내는 위업을 달성한다.  196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정밀기계는 커녕 손톱깎기 하나 만들수 없는 나라였음에도

전세계 유래를 찾아볼수 없는 고도 성장을 박정희가 보여주었고 과학 기술자들의 애국심과 피눈물 나는 헌신으로 

대한민국은 나름의 군사강국 대열에 까지 오를수 있었고  월남 패망후 핵 개발이라는 초강수까지 발전시킨다.  

 

 

 

신군부 전두환의 탄압과 박근혜의 복수  

박정희의 성장 일변도의 정책은 국민들로 하여금 불만을 야기시켰던 부분이 있었다 총화 단결은 일정부분

통제라는 측면이 존재했고 서구진영 68 폭동의 영향을 받은 빨갱이들은 민주화? 라는 개씹소리들을 해대며

대학가를 중심으로 서구의 히피문화를 동경하는 병신들이 양산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부가세를 신설했는데 부가세 신설은 조세저항이라는 정권의 목숨과도 직결되는 사항이였다.

박정희는 유신을 통해서 극복을 하려했고 국민적 불만을 상쇄키키려고 노력했지만 2차 오일쇼크와 과도한 

경기과열로 인한 폐해가 나타나 결국 부마사태를 맞이하고 차지철과의 권력투쟁중이였던 김재규에게 암살을 당한다. 

 

이후 12.12 이후 5.18 최규화의 하야로 신군부 전두환이 등장한다. 

 

전두환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 인사들을 청산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이들을 부정축재자로 몰아서 숙청하거나 참여를 독려했다. 그러나 오원철은 숙청 대상으로 몰렸다.

그리고 그는 사실상 10여년 동안 가택 연금을 당했으며  또 ADD 과학 기술자 800여명을 한방에 날려 버린다. 

 

박근혜는 이시기에 배신을 경험했다고 누누히 이야기 해왔으며 또한 산업화 자주국방의 주역들을 날려버린

전두환에 대해서 호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박근혜는 복수를 한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라 간략하게 언급을 한다. 탄핵사태때 박근혜를 부정적으로 몰게한 장본인들이 다시 재복수를 한셈 

 

 

참고로 오원철 이양반도 전두환에게 대단히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언론에서 밝혔다. 

나역시 전두환을 반만 인정하는 부분이다.  3저 호황으로 박정희의 과실이 쏟아질때 나름의 안정화를 

이룩했다고 볼수 있지만 엄청난 부정축재를 했다는 점에서 그는 지도자로서 갖춰야할 덕목중에

몇가지는 갖추진 못했다고 평가를 한다.   박정희 정권을 디스한것은 참을수 죄악을 저지른 셈 



모든 산업화의 주역들은 박정희를 존경한다.
독자들이 참고할만것은 박정희의 사람 컨트롤 스타일을 보면  묘한 공통점이 보인다.  

인물 발굴 --> 다소 무리한듯한 미션 ---> 그만큼 힘실어 주기 방식으로

긴장과 추진을 적절하게 믹스해서 컨트롤하는 공통점이 보인다. 

 

1992년 박정희 영전앞에서 성업보고서를 낭독하는 상남자 故박태준 

 

대부분 박정희를 만난 산업화의 주역들의 증언을 보면 박정희를 보면 카리스마에 눌려서 해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시작 했다는 것이 일치되는 대부분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만큼 힘을 실어주었다.

박정희 정주영 콜라보 박정희 오원철 콜라보  박정희 ADD 과학도들과의 콜라보는 지도자의 역량과

카리스마 그리고 부하들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사례다 

 

하면된다 VS 해봤어?  이 두양반의 콜라보는 진짜 신화 그자체 

 

 

대한민국은 산업화가 완성되지 않았다.

이승만의 저서조차도 태반이 모른다 또 박정희에 대해서 정말로 심도있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 

오원철을 모른다는 것은 박정희의 정책을 모르는 것이요 산업화가 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하게 경제발전해서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것은 경험해보지 못했던 세대들이 공감할수 없다.

경험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서 경제성장을 했고 발전을 시켰는지 그 내면을 들여다 보고 분석하고

해석하여야 한다. 그것이 현대 지성인들이 해야할 몫인 것이다.. 

 

 

 

 



막연한 존경심은 그릇된 신앙일뿐 

마지막으로 빨려면 제대로 알고 빨고 깔려면 제대로 알고 깠으면 한다.

확고한 신념일지라도 무분별한 진영논리로 산다는것은 죄악이다.

개인의 자유란것도 알아야 누릴수 있고 또 싸울수 있는 것이다. 아는것이 힘이고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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