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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History

정치인이자 기업인, 이명박 일대기

꿈을 위해 잠을 잊은 그대에게 2020. 4. 20. 12:18

 

 

 

 

 

 

 

 

 

본 게시물은 역사적 사실과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게시물입니다. 

 

 

기업인

 

 

 

이명박 (李明博)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기업인이다. 

기업인 출신 정치인으로 14,15대 국회의원과 32대 민선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했고,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이다.

 

 

 

 

 

 

 

 

 

 

 

 

 

 

 

 

 

 

 

 

 

 

 

그는 1941년 12월 19일 일제강점기 시절에 오사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복 직후 경북 포항에서 유소년기를 보냈지만 가난은 항상 그의 등뒤에 붙어있었다.

 

 

 

 

 

 

 

 

 

 

 

우수한 학교 성적으로 졸업은 하게 되지만 대학교로 진학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던 그는

 

 

 

 

 

 

 

 

 

 

 

 

 

낮에는 과일, 뻥튀기, 포장마차 등 장사로 학비를 벌어 야간학교에 등록하고

 

배고픔을 이겨내고 피나는 노력으로 고려대학교에 입학 할 수 있게된다. 

 

 

 

 

 

 

 

 

 

 

 

 

 

 

 

 

 

 

 

 

가난으로 항상 배고픔에 굶주려 있던 이명박은 나라를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는 군입대 신체검사에서 영양 실조 및 지병으로 병역의 의무를 면제 받게 된다.

 

 

 

 

 

 

 

 

 

 

 

 

 

 

 

 

 

 

고려대 재학시절 명석한 두뇌와 학우들과의 두터운 신임으로 

 

이명박은 학생회 간부를 지내고 박정희 대통령 정권의 1964년 6.3 한일협정 반대 반일 시위를 주도하여

 

내란 혐의로 체포된다.

 

 

 

 

 

 

 

 

 

 

 

 

 

 

그 후에 그는 현대건설에 입사하게 되고 대학생 시절부터 남달랐던 능력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정주영 회장에게 눈길을 사고

 

 

 

 

 

 

 

30대에 이사, 사장 그리고 46세때는 회장 자리를 맡게 되었고 그는 '샐러리맨의 신화', '월급쟁이 직장인들의 영웅'등 샐러리맨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시절하에 박정희가 주도했던 경제산업화, 근대화에 앞장 서고 개척하는 일원중 한명이었고

 

대통령의 뛰어난 지도와 국민들의 '하면 된다'라는 정신으로 1980년대에 수출 70억달러를 달성하게 된다.

 

 

 

 

 

 

현대 건설을 대한민국 1등의 건설회사로 튼실히 키우며 초고속 승진으로 회장자리까지 오른 그를 보고 사람들은 그의 발걸음은 멈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1992년 정경유착의 횡포와 부패로 좌절하고 있는 정주영 회장을 보며 정치에 입문을 결심하게 된다.

 

대한민국 산업화 근대화의 역사 현장에서 가장 빠르게 뛰었던 사람들 중 한명인 그는 정치에도 발걸음을 옮겨

 

14대, 15대 국회의원을 지내게 되고 그의 앞길을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문제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인용술이었다. 그는 측근의 문제로 점점 문제가 붉어져 나가자 

 

그 자신이 모든 짐을 짊어지고 1998년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게 되고 

 

훗날 그의 인생의 걸림돌이 되는 징역 2년이라는 치명적 오점을 남기게 된다.

 

2년뒤 2000년, 광복절 특사로 그는 복권하게 되고 그 이후에 그는 잠깐 멈춘듯이 보여졌었다.

 

 

 

 

 

 

2002년 서울특별시 시장선거에 출마하고 당선이 되어 

 

그는 다시 분주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서옛부터 서울의 골칫거리였던 청계천을 시민들의 쉼터로 가꾸어 나가고 

 

 

 

 

 

 

 

 

 

 

누구보다도 가난한 서민의 고충을 잘 알았기에 그는 환승제도라는 선진 경영제도를 추진하여 

 

서울 교통복잡 문제의 해결과 대중교통 활성화를 생각하게 되었고

 

대중교통의 활성화와 이용하는 서울 끝에서 끝까지 포장마차를 하는 시민부터 직장인들까지 어느 누구라도 저렴한 가격으로 

 

왔다갔다 하길 바라며 환승제도를 추진하였지만 

 

 

 

 

 

 

 

 

 

여러 시민단체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지랄염병이라는 문구를 들고 그의 정책을 규탄한다. 

 

여러 비난과 질책 끝에 그의 정책은 추진 되었다.

 

 

 

 

 

 

 

 

 

 

 

처음 제도를 접하는 서울 시민들은 혼란 속에 빠졌으며, 정책은 실패라며 끊임없는 비난에도

 

이명박은 묵묵히 환승제도의 혁신적인 성과를 기다렸고 그의 기다림의 끝에 

 

모든 시민이 환승제도의 경제적인 효과에 감탄하고 그를 규탄했던 시민단체들은 사라졌다.

 

 

 

 

 

 

 

 

이 밖에도 이명박은 여러 선진도시를 배우며 서울 시청 앞 광장이라는 서울 시민들의 쉼터를 생각해내고

 

시민들의 반응은 '왜 저럴까?'라는 생각이 다분했지만 끝까지 밀어붙여서 

 

여러 시민들과 좌파 단체들은 이명박의 기업인 시절 별명이었던 '불도저'라는 말을 이용해

 

시민들의 의견은 묵살하고 밀어버리는 '불도저 서울시장'이라고 비난하였고

 

수많은 비난에도 이명박은 뜻을 굽히지 않고 시청 앞 광장을 조성하고 시민들에게 내보이고

 

반응은 아주 폭발적이였으며 말 그대로 서울 시민들의 광장, 쉼터가 되었다.

 

 

 

 

 

 

 

좌파 단체들은 겨울이 되면 시청 광장에 넓게 깔려있는 푸른 잔디들은 쓸모 없어 보일꺼라고 다시 비판했지만

 

이에 서울시는 시청앞에 스케이트장을 건설하여 또 다시 서울 시청앞은 시민들의 행복한 웃음거리로 넘쳐났다.

 

 

 

 

 

 

 

 

부채 수도라는 말이 항상 같이했던 수도 서울의 부채를 기하학적으로 줄이고 

 

서울을 세계속의 도시로 탈바꿈하게 만든 이명박은 성공적인 경제 CEO 서울시장의 경험으로

 

노무현의 참여정부로 인해 심해로 깊숙히 빠져들어가는 대한민국을 구해내기 위해 

 

이명박은 대한민국의 경제 대통령을 꿈꾸게 된다.

 

 

 

 

 

 

 

 

 

 

 

당시 노무현은 지지율 최저 기록을 갈아치우고 

 

시민들과 여론 그리고 인터넷여론 '이게 다 노무현때문이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며

 

노무현의 신년인사를 보고 역겨워 밥 토했다는, 노무현의 얼굴만 보면 열이 받는다는 시민들로 넘쳐났다.

 

대한민국을 씹창으로 만들어놓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잃어버린 10년' 으로 인해 당시 여러 언론들은 물론 모두

 

17대 대통령 선거를 보고 '한나라당에서 강아지를 출마시켜도 당선 될 것' 이라고 한나라당의 압도적인 승리를 확신했고

 

대선에 초점이 맞춰지기 보다는 한나라당 내에서의 경선에 초점이 맞추어 졌었다.

 

 

 

 

 

 

 

 

 

 

 

 

 

경선에는 여러 한나라당 후보들이 나왔지만 이명박 VS 박근혜 두 주자의 대결로 굳혀졌고

 

 

 

 

 

 

 

 

 

 

당 경선에서의 승자가 대선에서의 승자와도 같았기 때문에 두 후보는 물론 각 후보를 지지선언했던 여러 의원들도 

눈에 불을 키며 호랑이마냥 달려들었었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대결은 대선이라고 봐도 무방했으며 중요한 경선이었기에 두 진영 참모진의 흑색비방이 난무했다.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경선의 승자가 곧 대통령이기에 모두들 지켜봤다.

 

 

 

 

 

 

 

 

 

 

치열했던 접전 끝에 이명박은 승리하고 박근혜는 깨끗하게 다음을 기약하게 되고

 

이명박은 경제대통령의 길로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져 갔다.

 

 

 

 

 

 

 

 

17대 대선 주요 후보들은 이인제, 문국현, 권영길, 이회창, 이명박, 정동영 (사진순서) 였으며

 

누구나 할거 없이 이명박의 승리를 점쳤기에 각 후보들과 정당들은 이명박 깎아내리기에 바빴고

 

열린우리당의 정동영 후보는 이명박과 악수조차 피하는 찌질한 모습을 보여줬다.

 

아무리 이명박을 깎아내려도 좀처럼 팽팽한 대선구도로 접어들기 힘들었다.

 

 

 

 

 

 

 

 

예상대로 호남지역은 정동영 후보에게 몰표를 주었으며

 

호남지역 이외의 '대한민국의 영토'에서는 이명박 후보의 압승이였고 

 

이명박은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하게 된다. 

 

 

 

 

 

 

 

 

 

 

이명박은 17대 대선 승리의 인터뷰에서 이번 대선은 노무현정권의 심판과 국민의 승리라고 했으며

 

12월 19일에 태어난 이명박은 12 월 19일 결혼식 그리고 마침내 12월 19일날 대통령 당선이되 

 

12월 19일은 그의 경사로만 가득한 날이 되었다.

 

 

 

 

 

 

 

이명박은 대한민국 선진화의 배고픔을 빨리 없애고자 소매를 걷어 올리며 뛰어나가는듯 싶었으나

 

 

 

 

 

 

 

 

하지만.....

 

 

 

 

 

 

 

 

 

 

취임 이후 청와대로 들어가니 서민을 좋아해 모든 국민을 서민으로 만들어놓은 

 

참여정부에서 싸놓은 실정이 너무 많았으며 그중에서도

 

한미 FTA 지연추진이 가장 문제가 되었고 한미 FTA는 광우병 촛불파동으로 번져나가 

 

이명박의 정부는 시작부터 흔들리는 것 처럼 보였다.

 

 

 

 

 

 

 

 

 

여러 시민단체들은 말바꾸기에 앞섰고 선동된 시민들은 거리를 메워갔으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들 자신이 뽑은 대통령 이명박에게 MB OUT이라는 문구로 그의 얼굴에 비추지만

 

이명박은 이 또한 국민과의 소통을 원할하게 하지못한 자신의 잘못이라며 국민들을 안정시키려했지만

 

FTA문제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고 FTA선동괴담은 퍼져나갔지만 

 

이명박은 늘 그래왔듯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고 한걸음씩 한걸음씩 묵묵히 걸어나갔다.

 

 

 

 

 

 

하지만 국보 1호의 숭례문이 불타올랐고 사람들은 숭례문이 불타면 나라가 불타는 징조라며

 

근거없는 비난을 시작했고 나날이 이명박을 향한 화살은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비난했던 모든 좌파시민들의 예상은 모조리 틀렸다.

 

 

 

 

 

 

 

 

 

이명박은 고질병이었던 대한민국의 4대강을 개척하는 슬로건을 내세웠고 

 

여러 좌파단체와 시민들은 '시대가 어느때인데 삽질이냐'며 비난했다. 

 

死대강이라며 비난했지만 이명박은 '앞을 내다보고 결정한 정책'이라 했고

 

그 결과는 대단했었다. 매년 태풍을 동반한 폭우로 인한 홍수로 피해액이 엄청났던 4대강 주변은

 

4대강 사업이후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자연재해 예방은 물론 주요 4대강을 시민들의 쉼터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이명박은 정권시절에 대한민국 반도에서 가장 사이좋은 3형제를 지옥으로 보내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세계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탁월한 지도자 이명박이 경제위기를 모범적이게 극복하였고 물가성장율, 등록금 인상은

 

지난 10년 정부에 비해 매우 안정적이였다. 매우 성공적인 정권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비극은 어디서나 존재했다.

 

 

 

 

 

 

 

 

 

 

이명박 정권 당시의 강력한 대북제재와 대북외교의 강견함은 

 

불안한 북괴들의 도발이 있었으며

 

대한민국은 천안함사건과 연평도 포격이라는 가슴 찢어지는 일을 겪었고

 

이 일로 천안함 46명의 용사와 연평도 포격으로 2명의 해병대 일원과 민간인 사망자 2명이 나왔다.

 

이명박은 북괴의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백령도와 연평도의 군력을 증강시켰으며 

 

당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은 김태영 국방부장관을 경질 시키고

 

대북강경정책과 도발방지 및 도발시 폭격기를 이용하겠다는 김관진 국방부장관을 임명하여

 

단호한 국토수호의지와 강력한 대북외교를 이어나갔다. 

 

 

 

 

 

이외에도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됬던 대한민국의 국민을 '아덴만 여명작전'으로 성공적으로 구출해

 

세계 여러 나라의 모범이 되었으며 '악질, 악당들과의 협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여러 좌파단체와 좌파시민들은 이명박 시절 허리가 휘어 죽어버리겠다고 했지만 

 

묵묵히 그를 지지해준 침묵의 대다수의 시민들은 그의 따뜻함과 의지를 알기 때문에 오히려 이명박 정권 시절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평등지수가 높아졌다고 생각하고 이는 증명되었다.

 

 

 

 

탁월한 안목을 바탕으로 실리있는 외교정책을 행했고 역대 대통령 처음으로 우리땅 '독도'를 방문하여

 

독도문제를 야기시키는 일본의 집요한 정신을 단숨에 사그라들게 했다. 독도 방문은 단지 일본에게 고함이 아닌

 

우리 국민들이 속시원한 일이었다. 이후로 일본과의 외교는 약간 멀어졌지만 

 

세계속의 대한민국의 위상을 나날이 높아졌다.

 

 

 

 

 

청와대 직원들은 역대 대통령중 항상 바쁘게 일했던 이명박 대통령이라고 기억했다.

 

나라를 위해 일하기엔 하루에 24시간이 늘 부족했다는 이명박의 퇴임 날짜도 점점 가까워져갔고

 

 

 

 

 

 

 

 

 

2012년 2월 25일 5년이라는 짧고도 긴 임기를 마치고 이명박은 퇴임을 한다.

 

 

 

 

 

 

 

 

 

 

 

17대 대선을 위해 경선에서 치열한 접전을 펼친 이 둘은 청와대에서 퇴임대통령으로 취임대통령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렇게 이명박은 가난한 집안에서 대통령까지 높고 밝았던 인생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대한민국의 국민의 일원으로 돌아왔다.

 

 

 

 

 

 

 

 

 

 

 

퇴임 이후에도 그는 대한민국을 위한 일이라면 서슴없이 앞장서는 사람이었고

 

 

 

 

 

 

 

 

 

 

 

 

이명박은 퇴임 이후에는 노무현처럼 명품 자전거가 아닌 일반 자전거로 사이클링을 하는 공원에서 흔히 볼수 있는 시민이 되었고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흥정하면서 사는 아줌마처럼 친근해졌다.

 

 

 

 

 

 

 

 

 

 

 

 

 

그도 우리처럼 서로에게 희망찬 한해를 기원하고 새해 인사를 주고 받는 대한민국의 국민 중 하나 이지만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회사를 세계 제일로 만들기위해 그의 일생을 바쳤던 '기업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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