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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History

박정희 대통령과 대한민국 경제성장

꿈을 위해 잠을 잊은 그대에게 2020. 4. 16. 12:08

박정희 대통령과 대한민국 경제성장

 

 

 

 

1962년에는 한일 청구권회담이 재개되었다

 

 

김정필과 오희라(?) 비밀회담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3  양국은 한일협정에 조인(join?) 한다.

 대가는 8억달러의 유무상 차관이었다.

 

 

"어떻게보면 박정희정부의 정치적인 도박이라고 얘기할 수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사람들이 반대하는데 이걸 강행한 이유가 뭐냐. 이것은 다름아닌 경제적인......"

 

(여기에 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부분에 대한 비판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 당시에 6.25 터져서 나라가 세계에서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너희 우리한테 잘 못 했으니 대마도 내놔

 

아니면 앞으로 100년 정도 매년마다 우리한테 사과해 (이게 뭐야 병신도 아니고)

 

 

그러길 바라는건가

 

 

뭔가 요구하려면 힘이 있어야지 힘도 없는 나라에서

 

보상금으로 퉁칩시다 라고 하는 것만 해도 잘 받아낸거 아니냐)

 

 

 

 

1964년에는 전쟁중인 베트남으로 병사들이 보내졌고 미국은 15천만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

 

 

 

 

1967년부터 파월장병들에게는 김치가들어있는 국산 전투식량이 제공되었다

 

 

1967년부터 파월장병들에게는 김치가들어있는 국산 전투식량이 제공되었다.

 

 

 

파월장병들에게는 꿈에그리던 고향의 맛이자 한국의 상품이었다.

 

설령 상한음식이 들어있어도 장병들은 고국(??잘안들림)을위해 불평한마디 하지않았다.

 

 

 

전쟁터에서 필요한 수많은 물품들이 베트남으로 수출되어나갔다.

 

 

 

베트남은 기회의 땅이었다. 사람도 수출의 대상이었다.

 

 

501의경쟁율을 뚫고 베트남에 파견된 기술자들도 달러를 벌어들였다.

 

기술자와 기업 군인이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돈은 64천만달러 달했다.

 

 

 

 

 

외화를 얻기위해 본격적인 수출전쟁이 시작됬다.

 

 

각하曰 : "당면 과제로서는 증산(?)수출 건설 세가지목표를 이미 내각에다가 지시를 했습니다."

 

 

(수출행진곡)

눈부신~조국건설~태양어쩌고~ 나가자~ 우리들도~ 수출전선에

수출늘려서 웃으며 복된살림 이루자~~ 어쩌고~~~ 뻗어나가자~~~~

 

 

 

당시 우리의 연간 수출액은 3천만달러선. 수출상품이라야 돼지와 오징어  일차산물이 고작이었다.

 

 

새로운 수출상품이 필요햇다.

 

 

수출품목을 다변화시키기 위해 가카는 해외조사단을 파견.

 

당시 해외조사단의 눈에  것은 밍크목도리였다.

 

 

 

 

 

 

" 돌아가서 박정희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이양반 성질히 급해, 그다음날 쥐잡기운동 했습니다 전국에 ㅋㅋㅋ "

 

 

 

곧이어 쥐가죽을 가공하는 모피공장이 세워졌다

코리안밍크라며 수출된 쥐가죽은 수십만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쥐잡기운동은 수출상품용 원료수집의 관건이기도했다.

 

 

당시 우리의 무기는 저렴한 노동력 .

 

이후 노동집약적인 섬유, 봉제 산업이 수출산업으로 떠올랐다.

 

 

 

수출 한길에 매진하며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3천만달러선이었던 연간수출액이 1억달러를 돌파했다.

 

 

 

 

 

수출증가에  역할을  것은 1965년부터 79년까지 

매달 한차례도 거르지않았던 수출확대진흥회의였다.

 

 

재연속으로

 

 

 

"보고드립니다. 지난달 수출 1500만불입니다

미국 가발수출 한것이850만불 봉제 섬유제품이 225만불 전자제품 130만불

농산품 기타 46만불입니다."

 

 

"......."

 

"지난달에는 수출목표액을 33% 초과 달성했습니다."

 

 

"좋아ㅇㅋ 짝짝짝"

 

 

"ㅎ흫ㅎ흐힣힣ㅎ흫ㅎ헣헣ㅎ핳ㅎㅎ"

 

" 수출계획이 되면 그걸 품목별로  만듭니다

매월  계획이 달성되느냐 안되느냐, 안되면 뭐가 문제냐 진단을 하고..."

 

 

 

" 내년도 수출목표는 2억불입니다.  부문별로 의견을 제시 하시오 "

 

 

" 각하 현재 담배 길이가....생략.... "

 

각하 : "  기업차원에서 어려운점은 없나? "

 

 

" 기업이 수출을 하는데 행정절차가 어렵고 복잡.... "

 

 

" 내무장관! "

 

 

내무장관 : "  가카! "

 

가카曰 : " 행정절차를 간소화할수있는 방법을 찾으시오 "

 

내무장관 : "  가카!!! "

 

 

 

 

 

 

 

 

수출확대진흥회의에서 정해진 목표는 무슨수를 써서라도 달성해야했다.

목표는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500만불이요?? 아니 저희사정  아시면서 왜그러십니까정말??

아니지금도 겨우 150만불 채우고있는데......"

 

 

"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위에서 그렇게 지시가 떨어지면 무조건 맞춰야되는거 모르십니까?"

(아나 발연기)

 

 

" 아니근데 안되니까 그러는거 아닙니까 "

 

" 그럼 한번만 봐주는셈 치고 400만불로 합시다 "

 

"안된다니까그러시네  "

 

"그럼 그렇게 알고 가겠습니다. "

 

 

 

" ...아니  "

 

 

당시 수출에 관한  안된다는 말은 있을  없었다.

 

수출독려는 해외공관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수출은 매해 40%성장이라는 믿을  없는 목표를 

달성했다.

 

 

 

" 국가가 적절하게 전략적으로 시장을 리드했고... "

 

 

 

수출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대규모 공단이 지어졌다.

 

 

 

공장을 채운 것은 여성 노동자 들이었다

매해 40%성장이라는 수출실적은 바로 이들의 땀의 결정체였다.ㅠㅠ

 

 

 

 

 

자본이 축적되며 기술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코오롱의 나일론 원사개발 성공

 

본격적으로 국산 나일론이 생산되면서 외화 수백만달러가 절감되었다

 

가격이 싸진 나일론은 날개돋친듯 팔려 나갔고 국만의 의생활도 바꾸어 놓았다.

 

 

"한국 안에서는 내가  주자다

 

이런 생각 때문에 이루는 일마다 전부 첫번째 사람이라는 

 

이런 생각 때문에 일의 보람이 아주 컷습니다"

 

 

 

국산라디오로 시작했던 전자산업도 날로 발전해 나갔다.

 

 

1966 금성사의 연지동(?)공장에서는 국내 최초로 흑백 텔레비젼이 생산되었고 

동시에 본격적인 TV시대가 시작되었다.

 

 

 

 

 

1967년에는 다목적 댐인 소양강 댐의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소양강  공사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역사였다. 그만큼 무모한 도전이기도 했다.

 

 

 

김선구曰 : "소양강 댐을 개발해야만 수도권의 홍수도 조절을 하고  

용수를 공급도 하고. 어려운 전력난을

해결할  있는... "

 

 

19736 반만에 소양강 다목적댐 준공. 동양최대. 세계4위규모의 댐을 완성1/3 경비로

 

돈으로는 환산할  없는  경험을 얻었던 순간이었다.

 

( 정주영 회장의 시멘트조달난을 모래자갈로 댐쌓기스킬 신의한수 이뤄낸 썰은 다들 알고있을듯)

 

 

 

 

"...이것은 소양강댐이후에 경부고속도로나 중동에 진출하는데 

 힘이되고 원동력이되었다고 말할  있습니"

 

 

 

1971 가을, 통일벼가 개발되면서 사상 최초로 식량 자급이 가능   것이다.

민족의 숙원이었던 만성적인 식량난을 해결해 주었다.

통일벼의 개발은 지난 10년간 쌓아온 기술발전과 성장의 결과물이었다.

 

 

 

"품종을 개발해서 이루어 진게 아니라 댐을막아서 비가안와도 벼농사를지을  있는 기본조성을...."

 

 

경제개발이 시작된지 10, 세상은 달라졌다

 

 

거리는 자동차로 가득 찼고

 

 

사회 기반 시설이 갖춰지면서

생활은 나날이 편리해졌다.

 

 

화장실은 집안으로 들어와 추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부엌은 입식(?)으로 바뀌었다.

 

 

 세상이 열린 것이.

 

 

농촌에도 전기가 들어오면서 

 

 

처마 밑에는 호롱불 대신 형광등이  걸렸다.

 

 

어디서나 수돗물을   있었다.

 

 

과거부터 내려오던 의식수준은 굉장히 높은 나라이고,  갭을 못견뎌 하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부국강병의 경제 개발을 했으면 좋겟다. 이런 물밑의지는 굉장히 컷는데 그걸 그당시

국가 지도층에서(박정희) 경제개발이라고 하는 파이프 시추공을 받으니까 엄청난 에너지로 

폭발이 된게 아닌가....

 

 경제학적으로 설명을 드린다면

 당시의 국제 경제 질서 개편을 굉장히 활용을 적절하게 절묘하게

 했던것으로...

 

 

1970 우리는 수출 10억달러를 달성했다.

 

 

전쟁직후 67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은 250달러로 높아졌다

 

꿈이 이루어  것이다.

 

전쟁의 폐허, 오랜 가난을 떨치기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와 도달한 영광의 순간이었다.

 

 

 

 

70 7월의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은 거침없이 내달렸던 성장의 역사를 상징했다.

 

(산업화의 주축이  경부고속도로 추진 당시 김대중,김영삼이 드러누워 그자리에 

옥수수밭 만들자고 반대시위 했던 썰은  알고 있을듯.)

 

아래는 경부고속도로 관련 

 

 

 

 

 

 

- 폐허 위에 쌓은 돌멩이 하나 마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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