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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의 불편한 진실

꿈을 위해 잠을 잊은 그대에게 2020. 7. 25. 17:00



2017년 5월 10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장미대선에서 당선된 날이다. 이날은 동시에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주체사상파(주사파)가 길고 길었던 30년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순간이었다.

 

 

 

 

 

 

바로 대통령 최측근에 있으며 권력의 실세라 여겨지는 비서실장에 임종석이란 사람이 내정됐기 때문이다.

 

 

 

 

 

그는 한양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반미친북사상을 가지고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김일성주의자인 소위 주사파의 핵심인물이다.

 

 

 

 

 

 

임종석은 1989년 전국대학생대표협의(전대협) 3기 의장시절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불어과 임수경을 대표로 선발하고 방북시켜 '평양축전참가사건'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3년 6개월의 형을 살고 나오나 그 이후에도 김일성주의를 공식적으로 포기한 적이 없다.

 

 

 

 

 

 

임종석은 비서실장 임명 후 함께 일하는 비서관 30명 중 17명을 운동권 출신 인사로 단행한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건국이념을 부정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최근에는 영화 <1987>까지 개봉하며 그들의 기념비적인 위업이 알려지는 듯하다. 이야기는 1987년부터 시작된다.

 

 

 

 

 

 

1987년 일어난 6월 항쟁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6월 10일부터 20여일 동안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민중항쟁이다.

 

 

 

 

 

 

6월 항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박종철이다. 그는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으로 87년 1월 13일 자정에 하숙집에서 연행된 지 하루 만에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조사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한다.

 

 

 

 

 

 

영화 <1987>을 보면 박종철의 죽음이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을 묘사할 뿐, 경찰이 그를 왜 연행했는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있다. 단지 그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투사로만 묘사하고 있다. 과연 그는 순수한 의도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였을까?

 

 

 

 

 

 

박종철은 운동권들이 조직한 '제헌의회그룹(Constituent Assembly Group)'에 소속되어 있었다. 86년 5월에 구성된 제헌의회그룹은 75~79학번 까지의 서울대 출신 50여명이 중심을 이룬 조직으로 국가를 전복시키고 사회주의 혁명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조직이다.

 

 

 

 

 

 

 

제헌의회그룹의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1단계: 무장봉기로 현 정부를 전복하고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한 뒤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민주주의민중공화국 건설

2단계: 기간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 등으로 정치·사회·경제구조를 전면 재개편하여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

 

 

 

 

 

 

이들은 1986년 11월 13일 신길동 가두시위, 1986년 11월 29일 신민당 개헌추진대회 서울극장 앞 가두시위 등 30여건의 폭력시위를 배후조종하고 <혁명운동의 기수를 제헌의회 소집으로>, <무엇이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진군을 가로막고 있는가> 등의 유인물을 제작하고 정치학교를 개설하여 조직원들의 사상교육을 실시한다.

 

 

 

 

 

그렇다면 제헌의회그룹의 탄생배경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제헌의회그룹은 85년 2월 총선을 기점으로 조직된다. 당시 김영삼, 김대중 소위 양김의 신민당이 제1야당이 되어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을 요구하며 개헌국면이 시작되었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제헌의회그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에 참가하는 것을 망설인다. 왜냐하면 직선제 개헌 투쟁은 결국 정치적 주도권을 쁘띠부르주아인 신민당에 넘겨주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버는 결과를 피하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전술은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제헌의회그룹은 러시아혁명에서 영감을 받아 '파쇼 하의 개헌 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본격적인 혁명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6월 항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86년 4월 28일 김세진(서울대 미생물학과 83학번), 이재호(서울대 정치학과 83학번) 두 학생이 전방입소교육에 반대하여 분신자살한 사건이다. 이들은 훗날 평양의과대학 의학과 4학년에 편입되었고, 2006년 북한의 민족민주애국렬사에 추서되었다.

 

 

 

 

 

 

당시 남자 대학생들은 5박 6일간 군부대에 입소하여 훈련을 받고 교련 1학점을 이수해야 했다. 김세진과 이재호는 입소당일 아침 신림역 사거리에서 전방입소 반대 시위 중 "전방입소 전면 거부 및 한반도 미제 핵기지화 결사 저지"란 구호를 외치며 분신하였다. 6월 항쟁 때 이한열의 죽음은 계획되지 않은 사고였지만, 이들의 죽음은 준비된 희생이었다.

 

 

 

 

 

 

 

김세진과 이재호의 분신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대학가에 주체사상파의 등장을 알리는 전주곡이기 때문이다. 분신사건 시위 때 그들은 “반전반핵 양키고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라는 구호를 내세운다.

 

 

 

 

 

 

이들은 독재타도를 외쳤던 이전의 학생운동과 명확히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시위 전면에 미제국주의 타도 등과 같은 구호가 처음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구호들은 왜 문재인 정부가 원전마저 제거하는 반핵노선을 걷고 있는지 예언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김세진·이재호 분신사건 이후부터 반제국주의 그룹이란 가면을 쓰고 등장한 주사파는 학생운동의 주류 그룹이 된다. 86년 봄이 지나가면서 이들은 가면을 벗고 자신의 본얼굴을 당당하게 공개했다.

 

 

 

 

 

 

주사파가 커밍아웃한 이래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아침 인사는 “어제 밤 대남 방송 들었냐?”였다. 못 들은 학생은 들은 학생한테 방송 내용을 전달받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1987년이 되면서 주사파는 학생운동의 대다수 조직을 장악했다. 주사파는 신민당이 주도하는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 투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결정했다. 주사파와 달리 제헌의회그룹은 직선제 개헌에 미온적이었고, 소수파였기 때문에 87년 6월 항쟁의 주도하던 대학생 시위대의 대부분은 주사파였다.

 

 

 

 

 

 

 

제헌의회소집파(제헌의회그룹)에 속한 박종철이 희생되었을 때, 주사파는 그의 죽음을 직선제 개헌 투쟁에 적극 활용하였다. 영화에서 “박종철을 살려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시위대는 대부분 주사파였다.

 

 

 

 

 

 

제헌의회소집파는 훗날 PD(People's Democracy/민중민주, 계급모순 강조)로 계승된다. 박종철 사망사건은 PD계열의 희생을 통해 NL(National Liberation/민족해방, 민족모순 강조)이 약진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박종철은 사망 후 1987년 3월 3일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학과 3학년에 등록되어 89년 8월 10일 졸업한다. 이는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가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과 자매결연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던 중 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다는 것이 폭로되자 전국적으로 직선제 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투쟁 도중 이한열(연세대 경영학과 86학번)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투쟁에는 극적인 변화가 생기게 된다. 바로 넥타이부대가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정부는 시위로 인해 6월 10일 직장인들을 조기퇴근 시키고, 도심을 지나가는 지하철을 무정차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도심의 직장인들은 회사에서 일찍 나왔는데도 집으로 갈 교통수단이 없어 시내에 계속 머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서머타임 때문에 해가 길어진 터라 시위대에 일반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 만들어졌다.

 

 

 

 

 

 

만약 넥타이부대가 합류하지 않았더라면 주사파가 주도하는 6월 항쟁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단언컨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희생이 6월 항쟁 성공의 필요조건이었다면 넥타이부대의 합류는 충분조건이었던 셈이다.

 

 

 

 

 

 

 

결국 정부는 직선제 개헌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군사정권은 패자가 되고 넥타이부대와 대학생 등 민중이 승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 그렇고 운동권 내부에서 보면 실상은 달랐다.

 

 

 

 

 

 

진정한 승자는 주사파였고 진정한 패자는 넥타이부대를 포함한 자유민주주의 세력이었다. PD계열은 6월 항쟁으로 NL에게 밀린 이후로 지금까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과거 부산지역 학생 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으며, 서울대 운동권 출신인 자유한국당 이종혁 위원은 "주사파에게 체재전쟁을 선포한다"며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군사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국민들에게 정부선택권만 돌려주면 이 나라는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번영된 나라로 잘 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30여 년이 지난 오늘 이것이 전략적 오류였음을 저는 오늘 국민 여러분께 자인하고자 합니다. 지금 이 나라는 주사파가 나라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선량한 넥타이부대, 대학생, 시민들은 주사파의 조직적인 의도에 철저히 속았다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17년은 주사파에게 역사적인 해라 할 수 있다.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난지 30년이 된 해이자, 그날의 주역이었던 운동권들이 청와대로 대거 입성한 해이기 때문이다.

 

 

 

 

5줄 요약

1. 6월 항쟁의 중심인 박종철은 당시 정부를 전복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려는 제헌의회그룹 조직원이었다.

2. 그들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해 체포됐고 정부는 다른 조직원들의 행방을 알아내고자 고문하다 박종철이 사망한다.

3. 이에 진상규명 시위가 일어나게 되고, 이한열까지 사망해 국민적 지탄이 거세지게 된다. 이때 넥타이부대의 합류와 함께 6월 항쟁이 일어나고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진다.

4. 하지만 6월 항쟁의 이면에 주사파가 있었고, 이들은 운동권의 주류세력이 된다.

5. 주사파는 30년이 지난 2017년 임종석을 중심으로 청와대에 입성하여 30년 전쟁에 승리를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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