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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History

대한민국을 일으킨 두 영웅

꿈을 위해 잠을 잊은 그대에게 2020. 3. 29. 01:06

 

 

 

조국근대화의 기수요, 민족중흥의 영웅이신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그와 함께한 거성들 중에서도 

우향우정신, 제철보국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대업에 크게 공을 세운 청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에 대해서 알아보자.

 

 

"각하의 명을 받은지 25년만에 역사를 완수 했습니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사심없이 헌신하라, 무한 경쟁시대일수록 필요하다"

"자원은 유한하지만, 창의는 무한하다"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 제철보국을 우리 인생의 신조로 삼자"

"신뢰를 얻으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

"항상 애국심을 갖고 일해달라"

 

 

 

 

"국가의 부름을 받고 영일만에 모였을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핵심 기간산업인 철강산업을 일으켜 보자는 비장한 각오로 모든 조소와 부정적 논리를 뒤로하고 건설에 박차를 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 손으로 국가경제를 일으켜 보려는 철저한 공인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고용인이 아닙니다. 포스코인이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국민에게 봉사해야 하는 공인이 된 것입니다."

 

"국가로부터 일관제철 사업의 소임을 부여받은 우리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국민의 여망에 보답해야 합니다. 개발도상국이 일관제철소를 성공적으로 건설 운영하는 것은 결코 어디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개인의 희생에 바탕을 둔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회사는 대일청구권자금을 전용하여 건설한 민족기업입니다. 우리의 모든 정열을 바쳐 신명을 다하겠다는 굳은 각오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가 이룬 물결.

 

근대화, 산업화

 

국가의 산업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자원은 디름아닌 철강이다. 

5.16 군사 혁명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혹여 혁명이 실패하거든 내 남은 가족들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을정도로 신임을 받았던 분.

 

1927년 경남 동래에서 출생했고

1933년 아버지가 근무하던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자랐으며,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가 해방이 되면서 중퇴 후 귀국하였다.

 

이 후 남조선 경비사관학교 (지금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1948년에 육사 6기생으로 임관 했다.

 

이 때 만난 사람이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1950년 6월 25일...3년이 넘도록 전 국토를 황폐하게 한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박태준 회장은 이때 적을맞아 용맹하게 싸워 '충무,화랑 무공훈장'을 받았다.

(훈장의 등급은 5개 이다. 무공훈장은 태극,을지,충무,화랑,인헌 5등급으로 나뉜다.)

 

그는 휴전 후에도 군에 남아 계속 복무 했었다.

 

 

 

 

대령복무 시절의 사진으로 알고있는데, 부인 장옥자 여사와의 사진이다. 잘생기셨지?

 

 

1961년 5월 16일 

 

 

 

 

2군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에 의해 군사정변이 발생했다.

 

다행히도 쿠데타는 무사히 성공했고 2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5월 17일 군사혁명위원회가 창설되었고 5월 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변경했다.

 

얼마 뒤 박정희 소장이 의장이 되어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본격적인 개혁을 시작할 때 박태준 회장은 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위원으로 임명 되었고,  새로이 기획되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하였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해체.

 

박정희 대통령은 대장으로 전역 후 대통령에 당선 되어 제3공화국을 열었다. 

박태준 회장은 육군 소장으로 전역한 뒤 국영기업 이었던 "대한중석"의 사장으로 임명된다.

(대한중석은 강원도 영월의 광산에서 텅스텐 광물을 캐다 팔던 기업)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은 보잘 것 없었는데, 텅스텐을 캐내어 팔던 대한중석만이 유일하게 달러를 벌어들이던 형편었다.

이마저도 채산성이 맞지않아 적자만 나던 상황.

박태준이 사장으로 취임한 후 1년만에 전부 흑자로 돌려놓음으로써, 기업가로서의 수완을 꽃 피우기 시작했다.

 

3공화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밀어붙였고, 석탄과 농업 그리고 경공업 분야등의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기초적인 것이었고...

 

 

 

 

국가를 부강하게 일으키기 위해서는 근대화, 산업화를 이룩해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화학, 철강, 기계, 건설 등 중화학공업이 필수였다.

 

 

 

 

그 핵심자원이 바로 철강.

 

하지만 당시의 한국은 그런 중공업을 운영 할 형편이 못됬어.

제철소를 만들자는 계획은 50년대부터 있었지만 쭉 실패해왔거든.

허나 모든 산업의 기본인 철강이 만들어져야 진정한 산업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법.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적인 철강공업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968년

 

박태준 대한중석 사장과 대한민국 정부의 합작으로 포항 제철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헌데 미국으로부터 자금줄을 지원 받으려는 시도는 실패...

당시 가진게 없는 맨손이었기에 미국측에서는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한거야.

 

이에 박태준 회장은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국내로 많은 자금이 들어왔었거든.

당시 이 자금은 농업, 어업분야에 쓰기로 명시 되어있었다.

박태준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허락을 받은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원들을 끈질기게 설득하였지.

 

여기서 유명한기 종이마패 일화다.

박태준 회장이 제철소 건설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도중,

청와대에서 박회장을 호출했어.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회장에게 필요한 사항에 대해 말하라 했다. 박태준 회장은 메모지에 계획을 적어 대통령께 건네자, 대통령은 메모지 위에 서명한 뒤 그에게 돌려줬어.

박태준 회장을 믿고 모든 권한을 맡기겠다는 신뢰의 표시!

 

고속도로 건설현장에 드러누운 핵대중이같은 정치꾼 놈들이 여기저디서 끼어들려했어.

허나 전권을 위임받은 박태준 회장은 흔들림없이 사업을 진행했다.

 

오랜 설득끝에 1억 2천만 달러의 자금을 쓸 수 있게 됬다.

그렇기 1970년 4월 1일

경상북도 포항시의 영일만에서 공사를 시작했지.

 

막상 공사를 하려하니 막막했어. 허허벌판이었지.

영일만은 모래만 쌓여있던 곳.

박정희 대통령 조차도 "남의 집 다 헐어놓고, 과연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걸까..."라고 탄식하셨으니...

 

 

 

 

이때 현장에서는 박태준 회장의 뚝심과 리더쉽이 빛이 발하였고 우리가 아는 "선조들의 핏값으로" "우항우정신"등이 생겨났지. 그렇기 모든 직원을 독려했던거야.

 

박태준 회장는 미국과 일본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먼서 노하우를 배워왔고 비효율이나 부실공사를 막기 위해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완벽하게 체크하였다.

 

(후에 포항제철 3기를 건설하던 중 부실공사가 발견되자, 80%완성 된 제철소를 그대로 폭파시켜버려. 참된 완벽주의)

 

 

 

건설이 좀 진행되고나니 이번엔 다른 곳에서 문제가 발생함.

제철소에 들어 갈 원료를 사올 곳이 없었어.

이에 박태준 회장은 호주와 인도를 방문했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신용등급은 엉망진창이었지...

끽해야 제철소 부지에 표지판을 세워놓은 사진만이 전부였거든...

허나 호주의 광산회사를 찾아 간 박태준 회장이 온갖 수단을 다 써가며 설득한 끝에 다행히 이문제도 해결됬어.

되려 원료를 잔뜩 사들이던 일본과 같은 조건에 팔겠다는 약속까지 받냈아지.

 

1973년 6월 8일 아침 10시

천신만고 끝에 제철소 건물과 장비는 일단 완성되었어.

박태준 회장은 긴장되는 마음으로 제 1광로에 불을 넣었지

 

 

 

다음 날인 6월 9일 아침 7시 30분

제 1용광로에서는 쇳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산업을 일으켜 줄 철강이 만들어지고 있는거다!

 

 

 

38개월이 걸친 고난의 세월이 보답을 받는 순간이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핵심이 되는 장소가 된거지.

 

 

박태준 회장은 여기에소 그치지않고 제철소를 더욱 키우는데에 노력한다.

 

75년, 77년이는 연이어 포항 2기 포항 3기를 건설하였지.

특히 포항 3기는 80%공사가 완성된 상태에서 부실공사가 발견되자 직원들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폭파시켜버렸다!

기업경영에 있어서 조그만 부실도 용납치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

 

 

 

1978년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포항제철을 둘러보는 모습.

 

여담이지만 72년 유신정권이 시작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박회장에게 동의를 얻으려 했으나, 박회장은 정치와 관련없이 포철에 더욱 집중하고자 이를 거절하였다.

 

박대통령의 주변인물들은 이를 이용해 박회장을 견제하려 들지만 그럴때마다 박대통령은 "그친구는 원래 그래"하며 웃어넘겼다고 한다.

 

 

10.26사건과 12.12로 인해 정권은 바뀌었지만 박회장과 포항제철은 흔들림없이 자기 일애 집중했다.

87년에는 광양에 또 하나의 제철소를 건설하였고 1년 뒤인 88년에는 광양 2기를 완성하는 등 거침없이 사업을 밀고나갔다.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광양제철소 준공식에 참석한 모습.

 

 

 

88년 광양 2호기 건설. 노태우 대통령과 함께.

 

 

특히 보국기업 삼성그룹의 창업자 호암 이병철은 최고의 친구이자 지원자가 되어주었어.

광양 제철소 건설에는 이병철 회장의 도움이 정말 컸었지.

 

 

 

작고한 고 이병철 회장의 모습.

 

 

박정희 전대통령에게 이야기 중인 이병철 회장 1965년.

 

 

박태준 회장은 제철산업 뿐만이 아니라 교육에도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새로운 인재들이 국가의 내일을 책임지리라는 생각이었지.

1986년 12월 3일 우리가 잘아는 포항 공과대학교(postech)가 설립되었다.

 

 

포스텍은 지금까지 1만 5천 가량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이 공돌이들은 지금도 우리나라 산업현장에서 불철주야로 노력하고 있다.

 

 

1992년.

박태준 회장은 드디어 자신이 구상했던 포항제철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13년 전에 먼저 유명을 달리한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 영전에 "명 받은지 25년만에 역사를 완수 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2011년 12월 13일

박태준 회장은 지병으로 인해 향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수십년간 기업경영에 일신을 바쳤지만, 남겨진 재산은 보잘 것 없는 집에 불과했다.

"박정희 대통령 옆에 묻어달라"는 고인의 유언대로

현지는 국립현충원에 잠들어 계신다.

 

 

 

"조국근대화의 기수요, 민족중흥의 영웅이라"

근대화의 영웅들에게 컨벤션센터인지 나발인지는 필요없다.

지금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저 산업현장이 바로 그들을 기리고 있지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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