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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History

어제까지의 역사 '건국 대통령 이승만'

꿈을 위해 잠을 잊은 그대에게 2020. 3. 29. 22:39

 

한 남자가 있었다.

 

 

 

 

쇠사슬로 묶인 중죄인.

 

 

 

​극심한 고문으로 손가락이 문드러진 그는

 

 

 

 

일간지 '매일신문'을 발행한 최초의 현장기자였으며,

 

 

 

 

몰락한 왕족이자

 

 

 

 

한국 임시정부의 지도자.

 

 

 

대한민국 정부를 건국한 초대 대통령이다.

 

이승만.

 

 

 

 

 

​이것은 그의 이야기이다.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들어온 미군은
한국의 실정을 잘 몰랐다.

 

 

 

 

때문에 일본인이 소유한 땅만을 한국인에게 나눠주려 했다.

 

 

이 때 이승만이 주장했다.

 

 

 

 

'인구 71%가 농업인인데, 그 중 54%가 소작농이다.'

국민 절반 이상이 소작농 신세였던 한국.

 

 

 

 

​'농지개혁법을 실시해야 한다!'

국민 대부분이 지주의 소작농인 것을 지적한 것이다.

 

 

 

민주당과 지주세력의 반발이 거셌지만

 

 

 

 

이승만은 개혁을 통해 농지를 분배한다.

 

 

 

 

또한 친일파 처벌을 위한 제헌헌법을 제정하여 친일파였던 국회의원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과거 일제의 식민통치는 이북을 공업, 이남을 농업위주로 진행하였는데

 

 

 

 

그 이유는 공업시설 대부분이 이북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력생산량이 북한의 4%밖에 안되는 상황.


그 상황에서 김일성은 모든 전력공급을 차단해버렸다.

 

극심한 전력난에 시달리게 된 한국.

 

 

 

 

 

더불어 좌익세력 '남조선 로동당' 출신 14연대 간부들이 전라도 여수, 순천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북조선 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 행동한다.'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달성하자.'

 

 

 

 

반란군은 대대적인 학살을 시작하였으며, 좌익주민들도 이 학살에 참여한다.

 

 

 

 

전라도의 경찰, 공무원, 우파세력, 우익인사...


2천여명이 살해당한다.

 

 

그 혼란속에 연달아 벌어진 6.25 전쟁.

 

 

 

 

전쟁초기, 한강철교 폭파사건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다.

 

 

 

 

1950년 6월 26일.

 

군부지도자들은 2, 3일 안에 美 원조가 오면 서울을 지킬 수 있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긴박감 속에 하루가 지났다.


1950년 6월 27일.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겠습니다.'


국방장관 신성모와 서울시장 이기붕이 들어와 말했다.

 

'안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통령은 문을 닫으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대통령에게 침착하게, 간절하게 부탁했다.

 

'지금 상황에서 국가원수의 신변에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존속이 어렵게 됩니다.'

 

국방장관이 들어와 말을 거들었다.


'각하께서 수원까지만 내려가주시면 작전하기가 훨씬 쉽겠습니다.'


(1950.06.25 ~ 1951.02.15. Francesca Donner's Confidential Notes 中)

 


 

 

1950년 6월 28일 새벽.

 

수도 서울은 점령당해 버렸고, 북한군의 손에 넘어갔다.
국군은 길로를 막기 위해 어쩔 방도없이 한강철교를 폭파하게 된다.

 

 

 

 

당시 눈물을 머금고 피신한 이승만은
이 사건 이후 공산주의자들과 북한군에 대해 이를 갈며 적개심을 품는다.

 

 

 

 

그렇게 전쟁을 계속하다 휴전이 되었고,

 

 

 

 

이승만은 포기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간다.

 

 

 

 

남은 것이라곤 사람밖에 없는 나라.

 

 

 

 

인플레이션 50000% 라는 지옥같은 나라.

 

 

 

 

아프리카 가나보다 못사는 가난한 나라.

 

 

 

'세계 최빈국'

 

 

이승만은 미국의 원조를 받아가며
나라 살림을 꾸려나간다.

 

 

 

 

다른 이들이 경공업에 투자하라 할때

먼 앞을 내다본 그는 중공업 육성에 투자한다.

 

훗날 이 투자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초석이 된다.

 

 

 

 

또한 전력전문가를 초청.


한국은 원자력 발전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그렇게 원자력 발전소를 짓고,

 

 

 

 

철강공장을 짓기 위해 투자한다.

 

 

 

 

 

 

또한 일본이 우수한 선박장비로 수산물을 남획하자
수산자원, 광물자원을 보장하기 위해 '평화선'을 그어버린다.

 

- 1952년 1월 18일 국무원 공고 제14호 -


(선포 다음달인 2월부터 일본 어선 나포를 시작.
저항하는 일본 어부한테 사격을 가해 44명이나 사살해버림.)

 

 

 

 

더불어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혁명까지 일으킨다.

 

 

 

 

역경과 고난을 헤치며
대한민국을 이끌어간 건국 대통령.

 

 

 

 

주변인을 너무 믿었던 탓에
부정선거가 일어나자,

다친 학생을 보며 하야를 결심한 이승만.

 

 

 

 

 

'한국은 요즘 어떻느냐?'


'예. 요새 젊은 사람들이 나와서

열심히 하니까 앞으로 잘돼 가겠지요.'


'이봐, 너는 남이 잘돼 간다는 말을 믿지 마라.
내가 그 잘돼 간다는 말 믿다가 이렇게 결단이 났어.'


'내가 한국에 민주주의를 심기 위해 나라도 건국하고 그렇게 했는데
내 밑에서 어떻게 그런 부정선거가 일어나고..
내가 참 그 잘돼 간다는 말만 믿다가..'


(1961. 12. 31. 이승만과 양자 이인수의 대화 中)

 

 

 

 

이승만.

 

 

 

 

 

 

 

 

 

나라를 위하여 그가 희생한 것에 비해

 

 

 

우리는 그에 대해 너무 모르고 또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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