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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History

현대 사회의 속박과 노예화 그리고 퇴보

꿈을 위해 잠을 잊은 그대에게 2020. 6. 23. 01:12

고대 그리스의 시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예제를 기반으로 생업 외의 취미활동에 충분한 시간을 활용할 수 있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약간의 일이 끝나면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로 아고라에 모여 끝없이 토론했고 그 결과로 수많은 사상이 탄생한다. 개별적 인격체의 능력과 개성, 탁월함이 극도로 발현되었던 것이다. 더욱 나아가 이런 담론을 기록하고 후세 집단에 넘겨주게 되면서, 그들은 유한한 개인의 생명을 극복한다는 믿음을 가지기도 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고도로 발전한 사회와 직접 민주 정치가 탄생한다.
 


(연설하는 페리클레스)

개체로서 분열되어 위태로웠던 인간이 비로소 정치적인 활동을 하게 되어 개인의 생명과 DNA 차원을 넘어 통합된 종으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 야만과 폭력의 해일 앞에 그리스는 멸망하고 그 땅 위에 중세라는 시기가 도래한다. 신 아래 공고한 계급제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종교 시대에서 인간에겐 종교가 있었고, 저마다의 계급으로 주어진 일을 했다. 인간의 신앙은 강력했고 신 아래의 질서는 무려 1,000여년 가량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성직자들의 타락, 재발견되는 합리론들, 부상하는 상공업 등등.... 오랜 종교의 시대가 저물고 바야흐로 중세가 저물 무렵, 봉건 카톨릭 세력과 대립하던 신종교 세력(개신교)은 지지 기반이 필요했다. 이때 경제적으로 대두되었지만 권력을 얻지 못했던 상공업 계층, 부르주아들은 이와 결탁한다.

 개신교도와 부르주아들은 공고했던 구질서를 타파하려 했고, 성공하게 된다. 재산의 축적을 죄악시했던 과거의 풍토와 달리 많은 재산은 곧 근면성실함의 증명이라는 생각이 사회 전체에 퍼졌다. 결과적으로 종교는 자본주의와 영합한 형태로 바뀌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종속되었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 중 봉건 카톨릭 세력과 극심히 대립한 청교도 세력은 아메리카로 이주했고, 현재 미국의 기반이 된다.)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부정적인 상인의 대표적인 상징, 샤일록)

신앙과 결합한 부르주아 세력은 더욱 성장했고 마침내 왕권에 도전하여 시민혁명을 통해 전시대의 계급 구조를 붕괴시켰다. 자유와 평등을 내걸고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사회가 모두에게 자유롭고 평등해졌을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

[왕 - 국민 형태의 계급 구조가 부르주아 - 프롤레타리아 형태로 변했을 뿐이었다.]


부르주아가 지배하기 시작한 근대의 이전과 이후에는 어떤 차이가 생겨났을까?


중세 때의 가내수공업은 비효율적이었지만 그 결과로 나온 상품은 온전한 개인의 창조물이었고 완벽한 자연 상태에서 스스로의 필요를 자신이 해결한다는 강한 의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진정한 개인의 창조였고, 그 중 뛰어난 일부는 훌륭한 예술로 승화되었다. 생산품은 단지 일부 남는 물건만 교환되었다. 사람이 생산의 주체이자 진정한 소비의 주체였다.


반면, 산업혁명 이후의 공업품들은 효율적이고 간단하게 사람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었지만 소비의 다양성을 무너뜨렸다. 개인이 자유롭게 개인 의지로 소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상 거대한 힘이 선택지를 정해주고 그런 범위에서만 움직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하지만, 자유란 착각일 뿐이고 언제나 사회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예인 것이다. (보드리야르, 시뮐라시옹)
 


(명품을 사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명품을 선호했을까? 우리는 상품을 사는 걸까 사회화로 얻은 이미지를 사는 걸까?)


이것이 이어져 당연시되어 인간의 발전과 창조 의지가 시나브로 소멸하기 시작한다. 세계대전을 계기로 공업화가 촉진되었던 기반인 제국주의가 몰락했지만 그 틈을 타 근면성실한 자본주의적 신앙인들,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았으니 이러한 영향은 더더욱 가속되었다.


본래 인간은 무수한 가능성과 본래 자신만의 독특함을 지니고 태어나지만,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단지 생존만을 위해 끝없이 발버둥친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한 식량과 자원을 지녔음에도 (현대 식량 생산량은 100억 명이 훌쩍 넘는 인간을 먹여살릴 수 있다.) 소시민들은 끝없이 사회의 요구에 맞춰 돈을 벌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하여 도태당하지 않는데에 지나치게 많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또, 개인이 자기의 강한 의지대로 소비활동을 했고, 이것이 곧 창조이자 예술로 연결되는 선순환이 일어났던 고대, 중세 시대와는 달리 현대 사회의 우리는 레디 메이드, 즉 기성품들에 한해 소비를 제한받는다. 스스로의 욕구를 성찰하며 찾고, 스스로 섬세하게 해결하는 등, 그에 맞는 자기만의 독특한 창조 경험은 현저히 적어진다. 어릴 때부터 이러한 환경에 노출된 우리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의지를, 창조할 수 있는 의지를 상실한 상태로 기존 사회 구조와 제도에 종속된다. 어쩌면 의지와 창조라는 개념 자체를 잃어버린지도 모른다.


위와 같은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예술, 창조는 파괴되고 오직 모방과 복제만이 남게 된다. 예술가라는 사람들조차 굶어죽는다는, 도태당한다는 압력에 굴복해버려 창조의 영역인 예술이 먹고 살기 위한 단순 노동과 같이 타락해버리는 위험 속에 빠진다. 그런 위협을 무릅쓰고 순수한 예술을 추구하는 극소수마저 어린 시절부터 창조 경험 대신 존재하는 상품과 그들의 기성예술에 끝없이 노출되어 그로부터 벗어나려 끝없이 발버둥친다.
 


 

게다가 분업화된 사회에서 개인의 생산 경험 역시 선택한 사회적 진로에 따라 극히 한정된 분야에만 그친다. 특화와 분업으로 사회의 수요에 자신의 생산 능력을 재단해 맞춰줌으로써 직장과 사회에 묶이고, 의존하게 된 인간은 거대했던 창조 능력을 더더욱 상실해버린다. 


만약 이를 깨달은 사람이 현 상황을 벗어나려 한다면 어머어머한 역경을 극복해야 한다. 기본적인 의, 식, 주 마저 주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지금껏 본인이 겪은 세계를 자르고, 불태우고, 무한히 부정한 끝에야 겨우 어린아이와 같은 시작점에 서는 기회를 얻고, 그 지점에서 또 수십 년의 뼈를 깎는 노력이 있은 후에 비로소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깨달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편하고 안락한 노예의 삶 앞에 극복하기를 포기하고 사회의 고만한 노예로 평생을 살길 선택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자유로운 것은 교육을 통해 부의 대물림을 실현하는 부르주아 계층 뿐이다. 그들은 자유와 창조 경험을 되물림하여 그러한 능력의 결핍을 가진 노예들을  복종시킨다. 이게 바로 현대 사회의 크나큰 역설이다. 자유, 평등, 인간 존엄성을 전제로 움직이지만, 우리는 부르주아 질서 밑의 대다수의 '노예'들로서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존엄하지도 않다. 하늘 위의 '신'들이 내리는 결정 이면의 배경을 영원히 알 수 없고 단지 일부 영특한 부류만이 그들이 내린 결정의 후폭풍을 미리 감지한 다음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고작이다.


시민혁명 때 전제군주였던 국왕은 죽었지만 부르주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부르주아는 완벽한 자유 속에서 수많은 '창조'를 해내고 노예들은 부르주아들이 창조한 사회구조와 예술 속에서 자신을 그 틀에 집어넣고 모방함으로써 오늘도 힘겨운, 살아남기 위한 삶을 산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아주 드물게 한 사람이 이 틀을 완벽한 천재성과 노력으로 깨부수고 온전한 창조를 하게 되더라도 그는 부르주아가 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사회가 여전히 착취당하는 노예들로 가득한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아귀지옥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스티브 잡스 같은 노예 출신 혁신가들이 노예들의 우상이 되게 부르주아들이 홍보하고 계층 이동의 헛된 희망을 끊임없이 노예들에게 주입하는 한 사회는 유지되고, 존속한다. 힘든 삶은 개인에게 충분한 경험과 교육을 제공하지 않는 사회의 탓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 부족 탓일 뿐이라고 노예들은 스스로 되뇌이고, 노력으로 한계를 극복한 우상들은 그 증거가 되어준다.


마르크스는 이런 점을 읽고 착취없이 모두가 공평하게 경험하고 생활하여 발전하는 사회를 원했지만 모두가 알듯 실패했다.


다시 고대 그리스를 돌아보자. 의, 식, 주의 걱정없이 모든 시민이 능력을 극대화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각자가 스스로의 의지로, 필요로 사회를 만들어 존속시켜나갔다.


현대사회는 눈부신 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인간의 의, 식, 주 부담이 현저히 줄었지만 의식이 진실로 자유로운 사람은 극소수이다. 도태의 공포 속에서 사회의 틀에 개인을 맞춰 넣게 되는 우리에게 자아실현은 요원한 일이 되었다. 사회가 존재하지만, 그 사회를 진실로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부르주아 뿐.


진실된 자유와 평등의 상실. 


사람에게 내재된 창조 능력과 잠재력 발현 기회의 상실.


어쩌면 현대 사회는 퇴보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우리가 태어난 세상은 사회 혁신을 갈망하는 한편, 알 수 없는 자유와 모호한 발전을 지향하며 들떠 있는 곳이었다." - 페소아. 불안의 책. 2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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